1. 그건 토끼였다. 학생회관 앞의 잔디 광장을 가로지르다 맥코이는 그것과 마주쳤다. 토끼는 그저 토끼여서, 평범한 흰색 모피에 정장도 시계도 없이 착실히 네 발로 뛰었다. 산책처럼 느긋한 속도였다. - 라디오는 고쳤어? 어깨로 고정한 수화기 너머에서 커크가 말을 이었다. 어제부터 간헐적으로 끊긴다는 게 어린 남자의 주장인데, 맥코이가 확인하기로는 어떤 주...
1. 설탕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라고 막연하게라도 믿었다는 데서 짐 커크가 여전히 청년기라는 사실을 본다. 사물의 과학적 성질을 알면서도 관념적 인상에 더 기대려는 것은 젊은 낭만주의자가 보이는 어리광의 전형이었다. 내 피가 녹색이었다면 주저 없이 그게 틀린 명제라는 백 가지 근거를 제시했겠지. 하지만 시적 허용은 인류가 발명한 가장 편리한 도구이...
1. 음식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위안이다. : 쉴라 그레이엄 2. 치즈가 녹을 때까지만 데워. 샐러드는 냉장고에. 본즈 글씨는 반듯하다곤 하기 어렵다. 필기체와 인쇄체를 자기만의 규칙으로 섞어 쓴다. 예컨대 L 대문자는 전자, 소문자는 후자. 필체는 성정을 반영한다는데 솔직히 레너드 맥코이란 인물의 어떤 부분이 이 글씨와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특징...
1. “사과하고 오렴.” 크리스토퍼 파이크가 말했다. “내 잘못 없어요.” 커크는 진심이었다. 그의 입장은 모난 곳 없는 원처럼 합당하다. “학생법정에서도 난 무죄랬다고요. 거기가 어지간해선 나한테 친절한 데 아닌 거 아시잖아요.” “주먹싸움 얘기가 아니다. 네가 이런저런 분란에 자주 휘말리는 건 사실이지만, 대개 정당방위란 사실은 내가 너보다도 잘 알아....
1. 수영장에서 얼굴이 달라 보이는 건 빛 때문이다. 도처에 물기가 있어 사물은 어느 각도에서든 반사광을 입었다. 커크가 잠수한 파동으로 흔들리는 수면에 대각선의 햇볕이 산란해서 천장의 물그림자가 동요할 때 맥코이는 북극광을 생각한다. 물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저쪽 끝에 도착한 커크가 개구리처럼 눈만 내놓고 맥코이를 바라봤다. 금발을 가려놓으니 벽안...
1. “좋아. 무슨 맛, 조조?” 커크는 조안나의 무게를 왼팔에 몰아 싣고 오른손으로 뒷주머니를 더듬어 지갑을 찾았다. 분홍색과 흰색 줄무늬로 지붕을 도색한 팝시클 트럭은 강변 공원길의 목 좋은 곳에 자리잡아 평일 2시에도 은근한 호황이었다. 관절이란 관절은 전부 보호구로 무장한 열두 살짜리들이 모서리가 닳은 스케이트보드를 제각기 허리에 끼고 웅성댔다. 결...
1. “지구에 있을 때 시킬 걸 그랬어.” 병실로 이어진 짧은 복도를 걷는 동안 맥코이는 같은 말을 다섯 번 반복했다. “수술해야 된다는 생각은 진작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기어이 망할 우주에서 받게 했군. 이러고도 내가 주치의다, 참.” 출입구의 인식기에 지문을 올린 채 우후라가 대답했다. “그냥 편도선 절제술이에요, 닥터. 재생기 없던 시절도 아니고 ...
1. 자정 부근에 시작하는 영화의 종료 시각은 25시. 그건 극장의 문법이다. 물리학적 사고로만 시간이 유연해진다는 주장은 착각이고 가끔은 시적인 허용도 천체의 운동처럼 핍진한 현실이기 때문에ㅡ적어도 극장 안에서는ㅡ그럴 수 있었다. 성립하는 논리는 모두 동등하다. 그러니까 자전의 역방향으로 경도 15도만큼 질주하는 일과, 화성으로 가는 일, 그리고 늦은 영...
1. 시간역학 교수는 다른 우주에서 온 사람이었다. 2. 그의 본적지는 무한한 평행선들을 통틀어 우리 세계와의 일치도가 가장 높은 우주 가운데 하나였다. 분기점이 무척 가까웠다. 그 정도의 근접함이라면 사회 전반의 구조나 체제는 물론 그 속의 개개인까지도 대부분 중첩될 만한 수치였다. 그곳에서도 자신은 스타플릿 대원이었다고 그가 내게 말했다. “여기서처럼...
1. 점처럼 작은 뒷모습으로 대령은 해변에 서 있다. 커다랗게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백사장과 도로의 경계에서 트레이스는 군화를 벗었다. 열이 밴 모래를 밟고 다가가는 동안 금빛 일몰의 낮은 고도가 그림자를 길게 늘였고 파도 위로 산란하는 반사광은 시야에 난분분한 잔상을 남겼다. 솔기가 닳은 가죽 외투는 늘 보던 그 옷이다. 받쳐 입은 흰 셔츠의 목깃에 ...
1. 확실히 밝히자면 카잔스키는 그 때까지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정이었고, 미첼은 7시에 현관을 박차고 나갔었다.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는지 불분명하지만 그들이 귀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아마 6시 전후였을 테니까, 하루의 4분의 1을 끔찍한 심기로 보낸 것이다. 간단한 나눗셈을 마치자 카잔스키의 기분은 더 처참해졌다. 그는...
1. 너는 계속해야 한다. 나는 계속할 수 없지만, 나도 계속할 것이다. : 사뮈엘 베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2. 바다에서 건져올린 직후의 조종사는 헐겁고 커다란 허물들을 겹겹이 두른 석고상처럼 보인다. 젖은 천과 금속 고리들이 사슬 같은 소리를 내면서 그를 도로 갑판 아래로 끌고 가려고 했다. 죽은 해파리처럼 부풀어오르고 늘어진 무기...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